아메드 야신(회교운동가)의 한겨레21 투고

아메드 야신(Ahmed Yassin)


나는 1936년 지중해 연안의 알조우라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깃든 알스카란지역의 한 조그만 이 마을이 내게 남긴 기억이라고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고통같은 것뿐이다.

이제 그마저 희미해져 버렸지만, 이복형제 둘을 포함해 모두 일곱아이들이 하루종일 어머니의 채소밭 일을 돕던 풍경이라든지 늘 먹을거리가 모자라 끼니때마다 아우성치던 일들이 떠오른다.

내가 네살되던 해, 아버지가 2차대전의 난리통에 세상을 떠나버리자, 단 한뼘의 땅도 없었던 우리는 아이들까지 모두 소작에 매달려 가까스로 끼니를 때웠다.

온 세상을 휩쓸던 그 전쟁 통에 누군들 배불리 먹었겠는가만은, 특히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7년부터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혹독한 가난 속에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 이제 굶주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영국과 유럽으로부터 온갖 신식무기를 지원받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이름 아래 비무장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국 통치당국은 이스라엘에게 전투기와 탱크에다 각종 대포를 지원하면서 대량학살극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단 한자루의 총만 지녀도 사형당하던 시절이었다.

이스라엘의 이 잔혹한 학살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1948년 들어 피난민의 숫자는 거의 500만명에 육박했다.

물론 우리도 마을주민 3000여명과 함께 난민 신세가 되었다. 피할 데라고는 바다뿐인 우리 마을 주민들은 결국 15km쯤 떨어진 가자지구 바닷가의 숲 속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나무를 먹었다.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런 최악의 상황은 국제연합구제사무국(UNRWA)이 먹을거리를 날라다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린 덮을 옷도 잠자리도 없었다. 내남없이 모두 나무 둥치에 기댄 채 땅바닥에 쪼그려 잠을 잤다.

그러다 국제연합구제사무국이 한 가정에 하나씩 지급한 5인용 텐트로 그나마 누워서 잠을 자게 되었다. 텐트는 비록 협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식당으로 부엌으로 침실로 공부방으로 심지어 화장실로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기능을 바꿔가며 전천후 살림집 노릇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쯤되니 공부도 학교도 끝장났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수재’로 불리던 내 꿈도 함께.


눈감았던 국제사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1952년 6월, 그 무더웠던 피난촌의 여름은 내 삶에 운명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나는 바닷가에서 또래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

넘어졌고, 그리고 한참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 사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의사들이 포기해버린 내 몸뚱아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꼼짝도 않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혼자서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손가락 끝만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 두어차례 이집트의 병원으로 옮겨져 받았던 치료도 헛일이었다. 목 부분의 척추뼈가 부러진 나는 결국 그날부터 마비된 사지를 휠체어에 얹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비된 사지, 내 몸뚱아리를 끝없이 쳐다보던 어느날, 내 정신만큼은 팔팔하게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작정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1958년 상급학교(오늘날 학제로 보면 고등학교에 해당)를 마쳤다.

그리고 교사시험에 응시했다. 각지의 상급학교, 사범학교, 농림학교에서 몰려온 수많은 응시자들로 그 시험은 15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무사히 이 관문을 통과한 나는 1958년 10월부터 알-카멜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어 1984년 건강 탓으로 더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을 때까지 근무했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나는 계속 종교를 공부했고, 가자지구에 있는 알-압바스사원의 설교자가 되었다.

사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이미 상급학교 시절‘회교회운동’에 가입하면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뒤 나는 시민들에게 알라(신)를 일깨우는 이 단체의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65년 체포당했다.

당시 압드 안나설 대통령은 이 회교회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체포된 두명의 회원들은 사형까지 당했다.

이무렵 나는 초등학교의 교사이면서 동시에 카이로대학 영문과에 다니는 학생으로 이중생활을 했다.

가자지구는 1967년 이스라엘이 강점할 때까지 이집트정부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나는 체포 한달만에 풀려났지만 이집트당국이 나의 카이로 여행을 금지시켜버려 대학을 1년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해 있던 가자지구에서 선교와 설교와 출판을 통해 보다 조직적으로 알라를 외쳤다.


그 시절 내가 외친 ‘알라’의 의미는 종교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었다. 침략자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내부사회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출판했던 내 책 가운데는‘저울 속의 술’이란 게 있었는데, 이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회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조직적인 부패를 조장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현실을 타격한 내용이었다.

교사로서 종교운동가로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다시 한번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967년, 내가 죽어서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침략. 이 날을 나는 1948년의 대학살과 함께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팔레스타인 영토 뿐만 아니라 주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침략했고, 팔레스타인 형제·자매들을 모두 외국으로 쫓아냈다.

1948년의 대량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결국 또 난민이 되어 요르단과 레바논을 비롯한 아랍국들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이스라엘은 대신 세계 각지에서 불러들인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땅을 집어주며‘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환희에 찬 유대 이주민’‘쫓겨나는 팔레스타인 난민’.

당시의 그 극명했던 불법과 부도덕을 바라보면서도‘지긋이’눈을 감았던 국제사회를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침략은 팔레스타인의 피가 흐르는 내게 ‘해방운동’을 명령했다.

침략자 이스라엘은 해방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했고 심지어 어린이와 여성들이 피난한 난민촌마저도 집중 공격의 목표물로 삼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 내부는 또 내부대로 썩어갔다.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술과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늘어만 갔다. 이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과 섹스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끄나풀이 되거나 정보원 노릇을 했다.

자신들의 조국이, 자신들의 형제가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판에.

여기서 나는 회교에 충실한 회교도의 정신 속에서‘성전’의 논리를 발견했다.

회교에서 가르치는 자기희생, 이건 바로 조국해방과 침략자 축출을 위한 투쟁 속의 ‘순교’였다.

신은 우리들의 희생을 허락할 것이며 결국 희생자들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나는 측근들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무장항쟁과 대중투쟁을 하나로 묶어 적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
그 결과,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1987년 12월14일,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대형집회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좀더 구체적으로 지하드(성전)의 전략을 수립해나가면서 한편으로는 항쟁의 하부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마스의 조직강화를 위해 1987년 12월 중무장 이스라엘군을 향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그 저항의 의지가 주로 회교연합이라 불렀던 자선단체들, 예를 들면 회교공동체 같은 조직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동시에 나는 종교서적 출판과 더불어 금요기도 같은 데서 설교하고 강연하는 일에 신경을 쓰면서 대중조직화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되돌아보면, 하마스의 실질적인 성전은 이미 1982년 나와 동지들이 무기를 구해 사용법을 익히면서 이스라엘 침략자들에 맞설 준비를 해왔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무장투쟁 준비는 이스라엘이 심어놓았던 첩자들에 의해 행동 직전에 탄로나고 말았다.

그 결과 나를 포함한 쉐이크압드 알라흐만 팀라즈, 아랍 무흐라, 닥터 모하마드 쉬합, 닥터 모하마드 사마라, 닥터 이브라힘 알 마쿠아드마와 같은 핵심인자들과 사비르 아부 우다 같은 대표적인 전사들이 체포되면서본격적인 무장투쟁의 시기가 애초 계획보다 지연되었을 뿐이다.

모든 무기를 몰수했던 이스라엘군은 동지들에게 3년에서 12년형을 그리고 주동자로 꼽은 내겐 13년형을 때렸다.

그 일은 1984년 6월 어느 날 벌어졌다.

들이닥친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들에게 군관 내의 경찰서로 끌려 갔던 나는 이스라엘군의 심문소에서 1차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아스카란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무기를 구입했는가에서부터 누가 조직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끝없이 물고늘어졌다. 나는 모든 걸 사실대로 자백했다.

“모든 무기는 내가 구입했고 이 무기들은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해 쓸 계획이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고 믿었던 탓이다.

이렇게 해서 40일간 계속되었던 지독한 심문은 끝이 나고 나는 4명의 동지들과 함께 가로 2.5m 세로 1.5m짜리 방에 수감되었다. 환기구도 창문도 없는 이 감방은 특히 여름철엔 지옥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나는 다시 라말라의 군병원감방으로, 또 가자의 중앙형무소로 계속 옮겨졌다.

나를 한자리에 두면 다른 수감자들에게 항쟁의식을 ‘전염’시킨다고 믿었던 모양인지.

가자중앙형무소에서 끝날 것으로 믿었던 이감은 다시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알 사바아형무소로 이어졌고, 얼마 뒤에는 다시 가자중앙형무소로, 또다른 사막의 나프하형무소로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 건강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고 이스라엘 당국은 나를 아스카란형무소로 이감시켰다.

그리고 1985년 항쟁 탓인지 나는 다시 사막의 사바아형무소 병원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나는 1985년 5월20일,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포로교환협상’으로 풀려날 때까지 지냈다.

석방된 뒤 무장조직 하마스를 창설해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우던 1989년 5월18일, 이스라엘군은 내가 살고 있던 가자지구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나를 다시 가자중앙형무소로 압송해갔다.

이번에는 채 16살도 안 된 내 아들 압드 알하미드까지 함께 끌고 갔다.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산덩이같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이스라엘군 심문관은 구타부터 했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다음 그들은 무장조직의 실체와 당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던 단원들의 신원을 불라고 요구했다.

이제 한국의 독자들에게야 고문없이도 자발적으로 불 수 있는 이름이지만, 당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던 그 무장조직은 하마스의 핵심인 ‘알무자히둔 알피리스티니욘’과 ‘팔레스타인 무자히둔’두개의 부대였다.


그러나 이건 1984년 내가 무장조직을 준비할 당시와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마스의 무장조직에 대한 정보를 적들에게 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군 수사관들은 내 아들을 데려와서 내가 보는 앞에서 거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갖은 폭행과 고문을 해댔다.

수사관들의 발에 짓이겨진 아이는 숨이 넘어가며 눈꺼풀이 뒤집혔다. 이런 상황 아래서 수사관들은 내게 자백을 강요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특히 수많은 곡절의 역사를 체험했던 한국의 아버지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여하튼 이 지독하고 야만적인 심리전, 그 속에서는 나는 내 아들이 죽어가는 꼴을 바라보며 팔레스타인의 모든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이건 내 아들과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침략자 이스라엘에 당하고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수난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끝내 입을 다물 수 있었다.

10일간의 격렬한 고문이 밤낮으로 이어졌고 나는 완전히 탈진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스라엘 수사관들은 나를 ‘짐승’이라 부르며 라말라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는 급성폐렴 진단을 내렸으나 수사관들은 나의 건강상태를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병원에서도 심문을 계속했다.

이미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하마스의 무장조직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고 다만 나의 자백만 남은 상태였다.


4개월이나 계속된 심문으로 초죽음이 된 나는 크팔 요나형무소로 옮겨졌다.

이때 이스라엘군은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나의 수형생활을 도울 이들로 본디 하마스 수감자 가운데 2명을 보조원으로 붙여주기로 했던 계획과 달리 2명의 팔레스타인 대중해방전선(PFPL) 단원들을 붙였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노려 하마스와 다른 노선을 걷고 있던 단체의 조직원들을 나의 수행원들로 임명했던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부터 나의 감옥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특별수인 내겐 햇빛도 들지 않고 환기마저 되지 않는 특별한 방이 주어졌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법적보호도 받을 수 없는 그 형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 3명의 판사 가운데 내게 터무니없는 편견과 부정을 지닌 한명을 거부했다. 판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법에 따라.

물론 이건 이스라엘 시민 가운데서도 잘생기고 힘깨나 쓰고 돈 많은 이들에게만 통용되는 법이겠지만.

기대도 없었지만 당연히 판사거부에 대한 나의 법적요구는 무시되었고, 나는 그 판사들로부터 ‘종신형+15년’이라는 특별한 형을 선고받았다.

“야신은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회교국가를 창설하기 위해 무장조직을 만든 범죄자로서…”라는 판결문과 함께.


크팔 요나형무소의 좁은 방과 저질스런 음식 그리고 열악한 의료환경은 이미 신체적으로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내가 견뎌내기엔 무리라는 판단을 했으나, 팔레스타인 시민인 내겐 어떤 대안도 없었다. 다만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감옥상황을 고발하는 수준밖에는.

혼자서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을 만큼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내가그래도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건은 그나마 듣고 볼 수 있다는 감각기관의 건강함이었는데, 이 감옥에서 결국 나는 청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도 도우미 없이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형편인데, 이게 바로 크팔 요나형무소의 ‘훈장’인 셈이다.
지금도 시달리는 이염이나 만성적인 호흡곤란증 같은 것들은 모두 그 형무소에서 얻었는데, 당시 내겐 치료라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인정되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서 반드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의 차원에서 나는 이스라엘 감옥의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세계 시민들에게 고발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반인권적인 탄압과 수감 환경은 접어놓고, 나는 수감자 가족들의 인권이라도 말하고 싶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가족들이 면회를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며 허가서를 얻는 과정조차 인권유린인데, 이보다 더 한 일은 면회소에서 벌어진다.

수감자도 아닌 그 가족들이 수감자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형무소당국은 야만적으로 면회 가족들을 발가벗겨 몸수색을 하고 있다.

면회도 이스라엘 감시관이 보고 듣는 바로 옆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옷과 음식 같은 것들을 전해주는 일들은 일체 금지되어 있고.


어쨌든 이런 현실 속에서 그뒤로도 나는 탈몬드감옥과 라말라감옥병원을 전전하다, 1997년 10월1일 석방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이 요르단에서 카리드 마샤알을 살해한 국제적인 범죄행위가 발생한 뒤, 그 요원과 나를 맞교환하는 국제적인 협상에 따라 결국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내게로부터는 비록 흘러갔지만,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 아직도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의 야수적인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젊은이들이 야만적인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까닭은 자신들의 조국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외친 죄밖에는 없고, 이 젊은이들이 반인륜적인
이스라엘 감옥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은 오직 침략자 이스라엘의 철수를 요구한 죄밖에는 없다.

나는 1997년 10월1일, 하마스의 동지 카리드 미샤알을 요르단에서 암살하려다 체포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요원과 맞교환하는 형식을 빌려 석방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나를 극단적인 ‘회교근본주의자’니 심지어 최악의 ‘테러리스터’라 불렀건 어쨌건, 나의 석방은 알라신의 의지였다고 믿었다.

해서 나는 이 무렵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인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밝히겠다고 결심했고, 그게 내가 공표한 잠정적인 대이스라엘 휴전 선언으로 드러났다.

이건 공격적인 침략자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희생당해온 팔레스타인 사이의 정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즉각 우리의 휴전 제의를 거부했고, 결국 우리는 또다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항쟁의 깃발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명확하고도 간결한 의지로 세계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의지를 알리고 싶다.

“나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그 누구도 전쟁과 유혈사태를 원한 적이 없다.”

핏빛 그림자로 뒤덮인 중동의 이 불행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의 땅과 성지를 강제로 점령한 채,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쫓아내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킨 이스라엘의 침략 앞에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대안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나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이래 오늘 2001년 4월까지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왔으나, 그동안 우리가 제의했던 어떤 형태의 대안이나 정책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추구해왔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은 모두 강자의 논리 앞에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모든 평화적인 노력은 온데간데 없이 내게 남은 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이 붙여준 ‘테러리스터’란 별명뿐이다.

테러리스터라?

이 ‘거룩한’ 별명이 내게 적합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난 김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 삶의 철학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을 ‘엄격’과 ‘관용’의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온건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그 지원세력들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또는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그 답은 간단하다.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 내 개인만을 놓고 볼 때도, 나는 법적 권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그 땅의 주인이다.

만약 외국의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다면?

그래서 당신은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는데, 누가 당신을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부른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조국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불러야 옳은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나는 그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는 칭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누가 외적의 침입을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며 ‘관용’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침략했을 때,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터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부르고 있는가.

왜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만 유독 국제사회에서는 테러리스터의 난동이라 불려야 하는가?

자유와 독립을 시민권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어떻게 이런 희한한 호칭을 팔레스타인에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다.


“누가 테러리스터고 누가 희생자인가.”

이 간단한 걸 구분하지 못하는 인류가 과연 그 복잡한 21세기의 평화 철학을 말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500만 팔레스타인 시민 가운데 400만명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에 의해 국외로 쫓겨난 이 현실이 아직도 부족해서?

아니면, 핵무기와 신경가스, 미사일과 최신예 폭격기를 지닌 이스라엘군 무장상태가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민에 비해 여전히 신통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국과 유럽은 이스라엘을 ‘희생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공격자를 희생자로 치켜세우고 희생자를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이 일그러진 국제사회의 이성이 적어도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국제연합, 이것도 한통속이었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 노예의 복종을 강요했을 뿐이다.

국제연합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 - 주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에 손찌검을 해왔는데, 유독 이스라엘만은 손을 보지 않았다.

국제연합의 모든 결정을 파기시켜온 그 이스라엘만은 온전하게 보호받아왔다는 말이다.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까무러칠 만큼 두들겨맞았던 이라크나 유고처럼 또는 리비아나 수단처럼 왜 이스라엘은 응징을 당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길 때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징벌 대신 최신무기를 안겨주며 오늘날 이스라엘을 중동 최고 무장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게 팔레스타인이 보는 국제사회의 ‘정의’, 바로 그 정확한 수준이다.


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그냥 놔두나

따라서 나는 <한겨레21>을 통해 확인한다.

만약 국제사회가 조국과 자유에 대한 숭배를 테러라고 규정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악질스러운 테러리스터라고 부르는 그들의 호칭을 명예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의 중무장 아파치 헬리콥터에서 발사되는 미사일들이 독립을 외치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스라엘군의 함포사격이 가자지구를 초토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지금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난민촌의 시민들은 직장을 잃고 물과 음식의 공급마저 방해받은 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다. 이스라엘의 침략을 거부하며 자유를 외친 까닭으로.


한국의 청년들에게 바라는 것

나는 <한겨레21>의 독자들에게 현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주의깊게 응시해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왜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군으로부터 50년이 넘도록 희생당하고 있는지, 어째서 국제사회는 5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현대사의 비극을 방치하고만 있는지….

나는 이제 팔레스타인 문제도 새롭게 국제사회를 짊어지고 갈 한국의 청년 독자들과 세계 시민들에게 달렸다고 믿고 있다.

특히 정의로운 한국의 <한겨레21> 독자들에게 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기도를 함께 담아 올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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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ishi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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